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원 간섭기 (문단 편집) == 여담 == * 고려는 [[공녀]]를 포함한 재물을 원나라에 바쳐야 했고 몇 십년간 일정 주기로 갈수록 내정 간섭을 심하게 했다. 그리고 이 공녀 중 한 명이 바로 [[기황후]]. 기황후를 포함한 몽골은 어떻게든 고려를 간섭하려 들었으나 결국 내정간섭은 공민왕 때와 그 이후의 최영과 이성계의 활약으로 기황후가 보낸 군대가 박살나고 원 역시 [[명나라]] [[홍무제|주원장]]의 [[북벌]]로 인해 수도 대도를 잃고 [[북원]]으로 쫒겨나면서 막을 내렸다. 아이러니하게도 결국 [[기황후]]는 [[원나라]]의 멸망을 가속화한 장본인이라는 것. 기황후의 무리한 [[고려]] 자극이 고려의 반원정서를 더욱 들끓게 만든 뒤 고려와 [[명나라]]의 연합을 만들었고 남쪽에서 명이 일어나는 와중에도 기황후는 1만의 몽골군으로 고려를 공격했다가 대패하고 단 17명만 살아남아 도주하는 등 무리수를 많이 뒀다. 원 순제를 구슬려 사실상 국정을 장악한 시점부터는 매관매직 등 아예 원나라 입장에서도 국가 막장 테크를 타는 수준으로 패악질을 부렸다. 이런 원나라의 횡포를 잘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홍규의 딸 일화이다. >[[충렬왕]]과 [[제국대장공주]]가 황제에게 바치려고 양가 집 딸을 뽑을 때 홍규의 딸도 뽑혔는데, 권세 있고 벼슬 높은 자에게 뇌물을 주어도 모면할 길이 없었다. 이에 한사기(韓謝奇) 더러 딸의 머리를 깎아 [[비구니]]로 만들면 어떻겠냐고 의논하자, 화가 홍규에게 미칠 것이라고 만류했다. > >홍규가 듣지 않고 딸의 머리를 깎아버리자 그 말을 들은 [[제국대장공주]]가 대노해 홍규를 가두고 가혹한 형벌을 가했으며 가산까지 몰수했다. 또 그의 딸을 가두고 국문하자, 딸은 자기 스스로 머리를 깎았을 뿐 부친은 정말 모른다고 진술했다. > >[[제국대장공주]]가 땅바닥에 끌어내려 쇠 채찍으로 마구 때리게 해 만신창이가 되었으나, 끝내 굴복하지 않았다. 재상들이 "홍규는 나라에 큰 공을 세웠으니 작은 죄를 무거운 형벌로 다스려서는 안 됩니다"라고 건의했고, 중찬(中贊) [[김방경]](金方慶)도 병든 몸을 이끌고 나와 간청했으나, 들어주지 않고 바닷섬으로 유배보냈다. 얼마 뒤 홍자번(洪子藩)이 극력 청해 가산은 돌려주게 하였으나, 노여움이 아직 풀리지 않아 그의 딸을 몽골 제국 사신 아쿠타이(阿古大)에게 넘겨버렸다. >---- >─ 《[[고려사]]》 <홍규 열전> 홍규는 원종 시기에 무신정권의 마지막 권력자인 [[임유무]]를 몰아내는데 공을 세우고 공신 작위을 받은 인물이다. 이런 기득권층의 딸도 마음대로 공녀로 차출하고 아버지도 도저히 자기 능력으로 안되자 딸을 [[비구니]]로 만들어서 어떻게든 빼내려고 했으나 결국 쇠채찍으로 고문을 당한 후 유배당했으며 그 딸은 결국 [[공녀]]로 차출당해야 했다. 여러 재상들이 용서해달라고 간청하고 당대의 명장이자 일본 정벌에도 참여한 [[김방경]]도 탄원에 동참했으나 처벌을 피할 수 없었다는 이야기. 이는 당시 아직까지 원이 건재한 상황이기도 했고, [[제국대장공주]]가 [[쿠빌라이 칸]]의 딸이라는, 역대 몽골 출신 왕후들과도 비교를 불허하는 수준의 혈통을 지녀 고려에서의 위상이 엄청났기 때문이다. 제국대장공주의 위상은 후에 왕으로 즉위한 [[충렬왕]]조차도 눈치를 봐야 했을 정도였다. 이런 일이 벌어지니 골수 친원파인 [[권문세족]] 같은 부류가 아닌 한 갈수록 결국 반원 감정이 안 들 수가 없다. 권문세족 중에서도 고려의 반원 투쟁 당시 몽골에 반감을 가지고 협력한 자들도 많은 편. 이는 [[충선왕]] 시절 귄문세족들의 입성책동 소동으로 알 수 있다. 고려에는 이미 정동행성이 있었는데 이건 원나라의 지방 행정기관 성이긴 하였지만, 지위를 원나라의 행정으로 규정하기 위한 형식적인 기관이었으므로 이를 없애고 고려에 원 자체의 행정을 설치하여 완전히 원나라에 편입시키자는 것이었다. 결국 고려의 모든 정치세력이 결사 반대하고. 고려 출신 환관인 방망고태(方忙古台)나 원 내부의 고려 사람들의 도움으로 논의 수준에서 무산된다. * [[원종(고려)|원종]]의 경우에는 신하들의 쿠데타로 쫓겨난 후 쿠빌라이 칸이 반대하자 복위되는 등 원나라의 말 한마디에 고려 정치가 좌지우지되며 왕이 하루아침에 바뀌는 몇 십 년간 횡포가 심해졌다. 이 당시 고려 왕은 몽골의 말 한마디에 휙휙 바뀔 정도로 허수아비 자리에 불과했고, 즉위한 왕 역시도 원 조정이나 원나라 황족 출신인 아내의 눈치를 보기에 바빴을 정도로 제대로 된 왕권 행사가 불가능했다. 이런 상황이 원종 때부터 원이 몰락하고 북원으로 쫓겨나기 전까지 계속되다 보니 원이 멸망한 후에도 고려 왕실의 권위는 바닥으로 떨어져 왕실에 대한 충성심은 진즉에 날아가버린 상태였다. 몽골은 고려 왕실을 몽골의 황금씨족의 일부로 인정해주었고, 공식적으로 계승권도 주어졌다. 하지만 고려 왕실의 권한 자체가 흔들리게 되기도 하였다. [[충선왕]]은 고려에 가서 통치하지 않고 원 수도인 대도에 눌러앉아 통치하고, 자신은 중국에 앉은 채 고려에 의견만 보내 통치하기도 했다. 나중에는 오히려 원 조정에서 충선왕에게 고려에 돌아가라고 하기도 한다. 그래도 이후 열악한 상황에서도 반원파를 중심으로 반원 개혁 정치를 하며 나름 활동은 할편. * 공식적으로 고려인들은 원나라가 정한 민족 등급 4단계에서 몽골인-[[색목인]]에 이은 세 번째 민족 대우를 받았다. 가장 아래가 [[남송]]인, 즉 남방 한(漢)인이었고 [[금나라]] 치하에 있었던 북방 한(漢)인과 한인 외의 민족들, 즉 [[여진족|여진]]이나 [[거란|거란족]]이 3단계인 고려인과 같은 계급에 있었다. 실질적인 지위는 몽골인-색목인이 지배계급이고 남송인이 피지배계급이니 중간 계급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로 고려는 자신들을 색목인으로 취급해달라고 부탁하였으나 외면당했다. 민족 등급 4단계가 정말 지배층, 피지배층 순서로 나열한 것인지에 대해 이견이 있다. 어디까지나 본속주의를 행하기 위해 분류한 것이라는 의견이다.그리고 고려에서는 [[몽골풍]]으로 몽골의 풍속이 유행하였으며 반대로 고려 여인들과 환관들로부터 고려의 문화가 퍼져 몽골의 고위 귀족과 황족들 사이에서 고려식 음식, 풍습, 옷 등이 유행하였는데 이것을 [[고려양]]이라고 한다. * 흥미롭게도 후대의 [[이제현]](李齊賢·1287∼1367)은 《김공행군기》에서 [[여몽 관계]]를 매우 긍정적으로 묘사하였으나, 막상 [[여몽전쟁|몽골제국의 침공]]을 직접 경험한 [[이규보]](1168∼1241)는 《[[동국이상국집]]》에서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하였다. 전자는 강대국과 우호적 관계를 맺은 점을 높히 평가하였으며, 후자는 [[몽골인]]들의 잔혹함, 고려 인구의 약 절반이 사라진 상황에 치를 떨었다. * 원 간섭기로 정착한 제후국 체제는 차기 왕조 [[조선]]에도 계승되어 청일전쟁까지 계속되었다. * 한국에 관심 있는 러시아인들과 우크라이나인들은 한국사 공부를 하면서 이 시기를 알게 되면 묘한 동질감을 느낀다고 한다. 그도 그럴 듯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몽골-타타르의 멍에]]라는 굴욕의 역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벨라루스 지역은 당시 몽골 대신 [[튜튼 기사단]], [[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의 위협을 받던 상황이고 몽골의 침략을 거의 받지 않았다. 몽골 제국의 간접 지배만 받던 모스크바 대공국 일대는 러시아로, 몽골 제국 및 킵차크 칸국의 직접 지배를 받던 [[키이우]] 및 드니프로 강 중류, 하류 일대는 우크라이나로, 독일 기사단을 막기 위해 [[리투아니아인]]들과 손을 잡고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일부가 된 민스크 및 주변 일대는 벨라루스로 분화된 것.] 차이점이 있다면, 현대 한국에서 [[칭기즈 칸]]에 대해서는 인식이 그렇게까지 나쁘진 않지만, 러시아인들은 몽골 및 이후 타타르계 국가들에게 하도 시달려서 칭기즈 칸을 갈아먹고 싶은 철천지 원수로 여긴다는 점이다.[* 다만 이것은 고려가 공격받은 것이 칭기즈 칸 시대가 아닌 이유도 있다. 오히려 고려와 연관성이 깊은 몽케 칸과 쿠빌라이 칸에 대한 시선은 미묘한 것이 그것을 증명한다.] [include(틀:문서 가져옴, this=문단, title=여몽 관계, version=244, paragraph=4)]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